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죽음을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죽음은 반드시 찾아오지만, 우리는 죽음 준비를 나중에 생각할 일로 미루어 둔다. 그리고 정작 죽음이 다가오면,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닫는다. 그제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지만 그 순간 이미 선택권은 우리 손을 떠나 있다.
죽음은 삶의 필연이지만, 존엄한 죽음은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삶은 존엄한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삶의 순간에 죽음을 잊은 채,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에 존엄한 죽음을 맞으려 해도 존엄은 지켜지지 않는다. 이런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는 건 개인의 잘못일까? 아니면 사회적인 구조적 문제일까?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회에서, 죽음은 늘 타인의 것이 된다. 타인의 장례식에 가서야 죽음을 생각하고, 타인의 호스피스 병동을 보고 나서야 삶의 끝을 상상한다. 하지만 정작 나의 죽음, 나의 마지막 순간은 언제나 다른 이야기로 남는다. 준비하지 못한 죽음은 본인과 남겨진 가족의 후회와 혼란으로 남겨지고, 본인의 존엄은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
죽음에 대한 존엄은 어쩌면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가치일지도 모른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가족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끝까지 붙잡고, 의사는 살려야 한다는 의무로 끝까지 치료한다. 그러다 보면 환자 본인의 뜻은 무시되고, 본인과 가족 모두의 고통이 이어진다. 이렇게 삶의 마지막은 인간다운 순간이 아니라, 제도와 타인의 선택 속에서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의 순간에도 나로서 남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치료를 받지 않는 것,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삶을 정리하는 것, 그리고 내가 존중받으며 떠나는 것이다. 존엄은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준비하고 선택한 결과로 남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일, 가족과 마지막 순간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일, 제도를 활용해 호스피스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는 일. 이 단순한 준비가 삶의 마지막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든다. 그러나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그 일을 미룬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일은 삶을 준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삶은 언제나 죽음을 향해 흐르고, 죽음은 삶을 거꾸로 비춘다. 존엄한 죽음을 묻는 일은 결국 존엄한 삶을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하고 다시 묻는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미루지 않으며, 끝을 향해 지금을 살아가는 태도다. 죽음에 대한 이런 준비가 있다면,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이어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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